오재선 2007. 2. 12. 21:46
 

네팔의 살아있는 신, 쿠마리

 

  바라나시를 떠나 8시간여 만에 네팔과의 국경도시 소나울리(sonawoli)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 군소재지의 읍만 한 작은 도시다. 어둠이 내리고 우리를 태우고 온 버스가 국경 바리케이트 앞에 멈추었다.

  인도, 네팔의 양국 국민들은 비자 없이 서로 왕래가 가능하나 외국관광객은 수속을 밟아야 한다. 네팔의 공직사회도 매우 부패하여 뇌물이 있어야만 통하는 사회라고 한다. 뇌물을 건네지 않으면 몇 시간 걸려야 하는 수속이 그런대로 쉽게 끝이 났다.

인도의 버스가 국경을 통과해 우릴 부려놓고 돌아섰다. 며칠간이나마 정들었던 운전기사, 꿀리들(짐을 날라주던 사람들)이 돌아가고 인도 쪽보다 꽤 질이 좋은 네팔버스에 올랐다. 우리나라 관광버스의 규모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인도나 네팔의 차선이 우리와 반대로 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운전석이 우리나라와 반대다.

  국경을 넘어서자 분위기부터 사뭇 달랐다. 길가에 늘어선 깨끗한 건물들, 잘 정비된 도로, 환한 불빛이 상큼하다. 네팔은 같은 힌두문화권이라는 점에서 인도를 많이 닮았다하지만 자연도 사람들의 모습도 확연히 다른 것 같다. 그들의 생김새는 오히려 우리와 비슷하다. 어둠 속을 1시간여 달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도착했다. 꼬박 한나절을 달려온 까닭에 모두 피로에 지쳤다. 룸비니 가든호텔에 들자마자 식사 후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2003. 2. 13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동산

  아침식사 후 룸비니동산으로 갔다. 네모반듯한 하얀 인공울타리너머 나무들은 아침조회시간에 앞으로 나란히 한 초등학생들 같다. 울창한 수림은 겉보기에는 어느 동물원 같은 느낌이다. 수렁과 언덕이 교차하며 나타나더니 하나의 건물이 나타났다. 마야부인 사원이다.

  오색 롱다는 큰 보리수를 중심으로 만국기처럼 길게 매달려 있다. 어릴 적 정월달에 마을 洞祭 때 성황당나무에 걸려 있던 천조각들 같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성지라고 하기엔 왠지 믿기지 않는다. 초전법륜지였던 사르나트의 녹야원처럼 초라하기 그지없다. 무당집이나 자그마한 암자에나 모셔졌을 작은 부처님이 조화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진 부처님의 큰 형상들만 보아오다 다소 놀랐다.

  정반왕의 뒤를 이를 첫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향하던 마야부인이 룸비니 연못에서 목욕을 즐긴 후 갑자기 산기를 느껴 사라수나무 밑에서 출산하였다 한다. 알 수 없는 향기를 지닌 연꽃을 피우고, 석가모니는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듯 사각형의 연못과 후세에 심었다는 보리수 두 그루가 전설처럼 서 있다.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아쇼카석주만이 유일하게 남아 이곳이 부처님 탄생지임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석주는 아쇼카왕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 째 되는 해, 이곳에 순례와 돌기둥을 세웠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것을 기려 이곳 사람들에게 조세의 면제와 생산세 1/8로 낮춘다고 적혀있다. 윗부분은 없어지고 기둥만 남아있다.  

  불교성지라서 순례자만 다녀가서일까? 관광지의 냄샌 조금도 풍기지 않는다. 길거리 토산품가게가 대여섯 집 있을 뿐이다. 목발 짚은 사내가 버스유리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덩달아 매달릴 사람도 없을 것 같아 1달러를 주었다. 차는 포카라를 향해 떠났다.

  네팔의 남부는 쾌적하고 싱그러웠다. 아열대기후여서인지 베어내지 않은 아름드리 삼림이 우리를 반긴다. 하늘도 파랗다. 하지만 그 기분은 잠시였다. 우리나라처럼 전 국토 63%가 산악지대인 관계로 도로사정이 아주 나쁘다. 비포장도로로 인해 멀미를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무도 멀민 하지 않았다. 모두들 건강하신 모양이다. 높은 고갯마루는 예사로 넘는다. 산의 기슭으로만 뚫린 도로, 덜커덩거림보다는 천길 벼랑이 더 공포감을 가져다준다. 도로는 폭우로 군데군데 파이고 산사태가 져서 길을 막고 있다. 위험하다. 여기까지 와서 죽진 말아야지.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눈앞에 가족들의 얼굴이 먼저 스친다.

  벼랑 밑으로 펼쳐지는 기막힌 풍경, 히말리아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수량이 풍부하다는 트리슐리(Trisuli)강. 물빛이 완전 비취빛이다. 저렇게 맑아 보이는 물도 석회암이 녹아 있어 식수로는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강폭이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게 동강분위기를 자아낸다. 네팔은 트래킹과 레프팅의 천국이란다. 이 강은 레프팅코스가 많아 세계 레프팅메니아들을 불러들인다고. 

  깊은 계곡을 접어들자 산꼭대기부터 벌집처럼 빼곡한 집들, 멀리서 보아도 토담이나 움막 같다. 산에 사는 부족들이 거주하는 집이란다. 그야말로 깎아지른 절벽 같은데 어떻게 오르내리며 생활할까? 더러는 화전처럼 계단으로 밭을 일구어 차나무를 가꾼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경이를 느낀다.

  포카라(Pokhara)는 네팔어로 호수라는 뜻을 지닌 포카리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안나푸르나의 눈 덮인 봉우리들과 아름다운 폐와호수(Phewa Lake)가 있어 사시사철 여행자들을 불러들인다. 아열대지역에 속하면서 어디서나 흰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데이비드 폭포(David Fall)다. 지하 150M정도의 깊이로 낙차 폭이 크며 폭포 아래로 떨어진 물은 지하 석회동굴을 통해 지하로 흘러 멀리 강으로 들어간다. 전설에 의하면 이 폭포는 트레킹 온 영국인 데이비드가 폭포 아래로 떨어진 후 사라져 버렸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 폭포이름을 지었다.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으나 내려다보니 정신이 아찔하다.

  티벳 난민촌에 들렀다. 난민들이  검소한 생활과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티벳어로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네팔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았다. 카페트를 생산하며 자연석을 가공해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뿌리내리고 사는 삶이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저녁 무렵 아름다운 폐와호수에서 보트를 탔다. 먼 산그림자 내려와 물가에 드리워졌다. 네 명씩 한조가 되어 노 저어 가니 넓은 호수를 노니는 맛도 일품이다. 뱃사공의 구성진 네팔노랫가락도 한몫을 한다. 캐시미어주 출신의 보조 가이드는 매우 다재다능하다. 자신이 사공이 되어 한 팀을 이끌었다.  

  포카라 상그리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별장분위기의 아름다운 정원에 반했다. 발코니에서 그윽한 음악을 들으며 차 한 잔 마시고 싶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하루쯤 더 머무르리. 나도 모르게 어정거렸나 보다. 사위가 조용해 메인홀로 나가니 회장님이 몹시 화가 나셨나 보다. 물을 튕기듯 말씀하시며 바로 쳐다보지도 않으신다.

  저녁식사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식당에서 된장국으로 먹고 모닥불축제를 했다. 모두들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팀을 짜서 그룹대항 합창도 했다. 어느 팀은 성악가출신으로 구성되었는지 꾀꼬리소리 같다. 양고기파티에 들어갔으나 특유의 누린내 때문에 한점도 넘길 수 없다. 짧은 시간을 내서 자연석 쇼핑을 나섰지만 마땅한 게 없다 잘못하면 가짜를 살수도 있고 바가지를 쓸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다.

 2003. 2. 14

   포카라관광의 하이라이트는 마차푸차르를 중심 으로 안타푸르나의 여러 봉우리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붉게 물드는 모습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매료시키니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박물관 회장님이 여행 내내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 마차푸차르 봉우리는 물고기 꼬리를 닮아 네팔인들이 신성시하는 산이며 입산금지 되어 있다고. 지금까지 등반에 성공한 사람도 없으며, 일본 등반객이 억지로 오르긴 했으나 돌아오진 못했다는 것이다. 이른 새벽에 어둠을 뚫고 그 비경秘境을 보기 위해 사랑곶에 올랐다. 

  사랑곶이라기에 어찌 우리말과 어감이 비슷해 혹시 연관 있는 지명일까? 내심 기대도 해보았지만 단순히 히말라야의 산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로 사랑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곶(Cot)은 왕이 살던 산이나 왕궁이 있던 산을 가리킨다. 설산 밑이라 추울까하고 두터운 옷을 껴입었다. 

  차가 산 중허리 쯤 기어 올라갔다. 포카라의 새벽야경 또한 볼만하다. 마치 별을 쏟아놓은 듯 반짝거려 매우 아름답다. 운동을 게을리 한 탓인지 쉽게 오를 순 없었다. 애써 올랐으나 신비의 마차푸차레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타푸르나의 모든 봉우리가 구름 뒤에 숨어 버렸다. 내 가슴에 허탈함이 자리 잡는다. 뒤늦게 불끈 솟아오르는 해가 얄밉기만 하다. 다시 찾지 못할 히말라야여! 포카라여! 안녕....... 

  카트만두 가는 길은 하늘을 오르는 길이다. 계곡의 굽이굽이를 돌고 돈다. 포카라와 카트만두의 길이가 직선으로 60KM에 불과한데도 도로는 200Km가 넘는 거리다. 석회석지반이라 터널을 뚫을 수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팔엔 철로가 없다. 중식은 홀리데이 홈에서 했다.

  카트만두가 가까워지자 차가 움직이질 않아 서 있기 일쑤다. 멀리 관광차 한대가 힘 빠진 증기기관차처럼 긴 꽁무니를 매달고 가파른 고갯길을 휘적휘적 오르는 모습이 애처롭다. 저기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인지 두렵기만 하다. 길이 하늘과 맞닿아있다. 저게 바로 지상낙원으로 통하는 문이라 해도 오르고 싶지 않다.

  분지형 수도인 카트만두는 해발 1324m의 고산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고도가 포카리보다 300여m 더 높다. 하늘고개를 넘어서자 시가지가 펼쳐졌다. 공해가 심해 마스크를 준비하라더니 숨 막힐 정도는 아니다. 인구 300만정도로 대구만한 도시다. ‘여행자는 산을 쳐다보고, 네팔인들은 여행자의 주머니를 쳐다본다.’는 말이 있듯이 네팔인들은 관광수입으로 살아가나보다. 각 도시마다 나름대로 발달된 시장이 있었다.

 두르바광장 부근에 내려 일행은 시내관광에 나섰다. 옛 왕궁이며, 쿠마리사원, 타밀거리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은 세계의 배낭족들이 몰리는 곳이다. 광장에는 네팔 골동품상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다. 구경하기 어지러울 정도로 많으나 주종을 이루는 것은 코끼리상, 힌두신의 형상, 붓다상이다.

  구왕궁을 둘러보았다. 왕은 새 궁전으로 이사를 하고 없다. 왕궁은 건물 거의가 700여 년이 되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2층 목조건물인 쿠마리사원 으로 갔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하려는 듯 사람들이 거처하는데도 음침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여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이층 열어젖힌 창틀에 얼굴을 내민 것은 대여섯 살 된 여자아이였다. 머리를 틀어 올려 장식한 걸보니 쿠마리인가 보다. 그녀를 보니 아린 마음이 앞선다.

  살아 있는 이 여신의 집은 말라왕족의 마지막 왕인 자야 프라가시 말라가 16세기에 지은 건물이다. 처녀신으로 알려진 쿠마리는 명문가에서 선발한다. 네와리 시크리계급으로 몸에 상처의 흔적이나 병이 없어야한다. 초경이 시작되기 전까지 모든 힌두인들로부터 여신으로 추앙받는다. 쿠마리는 왕이 왕조의 번영을 위해 어린 소녀를 여신으로 숭배한 게 그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9월의 언드라 차드라축제 때는 국왕마저도 무릎을 꿇게 한다. 사원에 머무는 동안에는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고, 초경이 시작되면 쿠마리자리를 물려준다. 쿠마리로 사원에 거주할 땐 국가의 지원으로 가솔들까지 넉넉함을 누리나 민가에 돌아와서는 결혼도 할 수 없으며 귀신 붙은 여자라 하여 천대받으며 불행한 삶을 살다 가는 수가 있다. 하지만 더러는 재산을 포기하고 결혼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일설에 말라의 마지막 왕이 어린소녀를 성폭행해 그 소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소녀의 혼이 밤마다 왕의 꿈에 나타나 괴롭히므로 혼백을 달래기 위해 쿠마리를 선발해 여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 후 그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왕조는 멸망했다는 것이다. 

 타멜거리로 쇼핑을 나섰다. 대구의 동성로나 서울의 명동 같은 거리다. 세계의 배낭족들이 붐비는 곳이다. 인파들로 북적거렸고 흔히 하는 말로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는 만물상의 거리다. 공산품 가격은 외려 우리보다 더 비쌀 수도 있으나 대부분이 아주 쌌다. 특히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산악인들로 등산장비가게가 가장 많았다. 등산복과 스틱을 장만했다. 짐만 부풀린 게 아닌가. 괜한 욕심의 발동에 후회했다.

  저녁에는 네팔 전통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민속춤공연을 보았다. 여행의 막바지라서 그런지 배가 고프고 졸음도 와 빨리 호텔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슬슬 집 생각도 나기 시작했다. 카트만두 하이얏트호텔에 투숙하였다.

2003. 2. 15 

  카트만두 트리뷰반 국제공항의 활주로가 안개에 싸여 있다. 좀처럼 걷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발을 묶으려나. 지루한 공항 대기실이 웃음바다가 되니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생전 잘 웃기지도 않을 것 같은 약사출신 G가 능청스럽게 맨소래담 코메디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어머니가 약사인 며느리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후두염이 잘 낫지 않자 맨소래담을 한 숟갈 떠먹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효기간이 몇 년 지난 것을....... 약효였는지 우연인지는 몰라도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이 아닌가. 모두 배꼽을 잡고 박장대소하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비행기는 활주로를 사뿐히 날아올랐다.

  맑은 하늘아래 히말리아가 빚어내는 신비한 설산의 비경이 좌측 창 너머로 펼쳐졌다. 어제 보지 못한 한이어서 인지 안전벨트를 풀고 모두 그쪽으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