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야누스, 업경대에 비친 내 얼굴

오재선 2007. 11. 27. 09:26

야누스, 업경대에 비친 내 얼굴

오재광

   가을의 한 가운데 선 수도산네거리의 은행나무가로수 노란 축제를 벌인다. 나무는 초록 속에 한 여름동안 품고 있었던 알들을 부화시키는 듯 노란 나비 떼가 쉼 없이 날아오른다. 떠남을 앞둔 잎사귀들의 피날레다. 가을의 마지막 아름다움이 저렇게 우아할 수 있나. 꼭 내 나이 만큼에 와 있는 계절의 무늬와 색감이다. 내 삶도 저렇게 곱고 예쁘게 수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 은행잎의 뭇 흩날림을 보면서 문득 사후세계에 대한 염려가 머릿속에 맴도는 건 왜일까?

   이른 아침 G사찰로 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지난밤 한승원의 ‘키조개’를 새벽녘까지 읽었던 탓인가. 열여덟 여고생시절이 아니라서 밤새워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게 얼마만이였나. 하루에 읽어냈다는 작은 기쁨과 하잘 것 없는 것에 기뻐하는 내 자신에 대한 연민이 초록과 노랑으로 대비된다.

   '키조개'는 연꽃바다해안에 각기 둥지를 튼 소설가 한승원과 시인이며 소설가인 허소라, 두 작가가 주인공이다. 그들의 가슴에 불 지펴지는 바람소리려니 했다.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지옥도, 그들이 동시에 꾸었다는 꿈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그들은 지옥을 다름 아닌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H박사의 줄기세포연구에 얽힌 관련인물이나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들이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보내지는 일이다. 사회현실이 지나치게 반영된 것이 다소 억지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나보다. 

   그런데 가족들이 자다 모두놀라 일어났다. 내가 가위에 눌려 큰소리로 고함쳤나보다. '난 꿈속에서 그들이 말하는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 미로에 갇혀 아마득한 출구를 찾아 헤맨다. 길은 하수관 같은 좁은 구멍 속이다. 그곳을 벗어나려 나부대고 바동거릴수록 더욱 좁아드는 통로, 점점 깊은 나락으로 빠져든다. 생은 찰나인가보다. 밀폐된 공간에서 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꿈속에서 깨닫는다. 신을 찾아 울부짖는다.'

   평소 어느 종교와도 인연은 그리 깊지 않은 나다. 신을 부정하려는 삿된 마음이 이미 나를 점령하고 있어서다. 어릴 적 마을에 새로 들어선 교회가 좋아 부흥회에 열심히 가보았지만 불교집안이라 엄마의 만류로 그만 두었고, 성당에 나오면 신학대학 보내준다기에 그곳에도 얼마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다. 불심은 내면에 잠재해있으나 신심이 도탑지 않은 탓에 늘 변방을 기웃거릴 뿐이다. 부처님과의 인연도 옅은 것은 마찬가지이리라.

  선방지기인 지인의 권유로 한 달에 두어 번 사찰을 찾는다. 가끔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는 불기 닦는 일을 도와준다. 오십여 년 동안 알게 모르게 지온 업장. 불기를 닦음으로써 소멸되리라는 얄팍한 계산이 밑에 깔렸다. 부처님은 이미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들여다보고 계실 텐데도. 꼼수를 놓는 게 또 하나의 죄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부처님도 나를 내려다보고는 어처구니없어 빙그레 한번 웃으시리라.

   이미 서너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식기를 닦는 이, 향로를 닦는 이, 각기 염원을 실어 제 할 일에 열중이다. 긴 촛대가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른 이들이 닦아 놓은 것들은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데 내가 닦는 것은 혼탁한 내 마음처럼 점점 더 흐려지는 듯하다. 손아귀의 힘이 부족해서인가보다. 촛대가 거의 닦여졌다 싶을 때 무심코 들여다보았다. 

  아! 수십 개의 나, 천의 얼굴이다. 긴 촛대에 조각된 문양의 크기와 폭에 따라 내 모습은 모양을 달리하며 파노라마처럼 나타난다. 극과 극은 동전의 양면처럼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좁은 곳은 아예 얼굴이 없다. 검은 털만 부스스한 금수(禽獸)형이다. 문양의 폭이 넓어질수록 차츰 인간의 모습이 되어간다. 또 반대로 들여다보면 인간의 모습에서 짐승의 형상으로 변해간다. 촛대에 조각된 문양의 폭은 사람의 마음 폭과 비례해 보여지는 듯. 그래, 나는 어느 순간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고,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친다. 업경대가 머리에 스쳐지나간다. 이 촛대가 혹시 업경대.......

   인간이 죽어 저승가면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기 전 업경대[業鏡臺] 앞에 선다고 한다. 인간의 죄를 비추어보는 거울이라 한다. 업경대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나타나며, 선한 이 천당에 가고, 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이나 보내진다나. 지옥은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곳으로 육도(六道) 중 가장 고통이 심한 곳이라 한다.

   지금껏 살아오며 지은 죄 오죽하랴. 한승원의 구절구절을 빌려 조목조목 나열한다면 얼마나 될까? 됫박 속에 쌀알만큼이나 헤아리기 어려우리라. 내 사랑하는 이들이 나로 인해 가슴아파한 일, 빈약한 삶을 남의 아픔에 비교하며 달랬거나, 여럿 어울렸을 땐 칭찬보단 비방하는 데 더 열을 올린 것이며, 꽃과 나무를 좋아한다는 미명아래 가지를 휘감고 꺾어서 상처 준 죄 얼마인지. 사노라면 잊힌 것도 있을 것이나 가끔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것들, 업경대는 바로 내 마음 속에 존재하리니.